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고슬라비아 전쟁 (문단 편집) === [[요시프 브로즈 티토]]의 집권 === 전쟁이 끝나자 유고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파르티잔은 군주제 폐지와 망명 중인 [[페타르 2세]] 국왕의 군주 지위 박탈 등을 선언하고,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,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. 그리고 [[요시프 브로즈 티토]]를 연방의 초대 [[총리]]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공산 독재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. 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공산화 과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[[소련]]과 갈등을 빚었고, 결국 [[1948년]] 소련의 독재자였던 [[이오시프 스탈린]]은 유고의 코민포름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며 공산권에서 축출했다. 코민포름에서의 축출 이후 티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집중했는데,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[[미국]]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[[냉전]]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중립, 비동맹을 표방한 것이 대표적이다. 외교적으로 [[인도]], [[이집트]], [[인도네시아]] 등 [[제3세계]]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 시기 유고는 티토의 지도하에 자주적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.(티토는 [[1953년]]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되었다.) 티토는 복잡한 민족과 종교들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해,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에서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. 특히 공산, 자본 진영 어느 한쪽의 눈치도 안 보고 공산권의 맹주였던 [[소련]]의 [[MiG-21]] 전투기, [[프랑스]]의 [[에어로스페시알 가젤|아에로스파시알 가젤]] 경공격 [[헬리콥터]] 같은 최신예 무기들을 사오고 외교적으로도 안정되는 등 큰 번영기를 누렸다. 문화산업도 크게 발달하여 [[락밴드]]나 [[아이돌]]도 많이 배출했고 [[올림픽]], [[월드컵]]과 같은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.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가진 문제들(인종, 지역별 빈부 격차, 종교)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. 티토 생전에는 티토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으로 이 문제가 수면아래에 있었지만, 그 시절에도 간간히 민족주의자들이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측에 불만을 표출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벌금형에 처해지는 필화사건이 여러번 있었고, 결국 티토 사후 이후에 이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